샤를 3세 드 부르봉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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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샤를 3세 드 부르봉 공작은 16세기 프랑스의 귀족으로, 프랑스군 총사령관을 역임했지만 프랑수아 1세와의 갈등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협력하여 프랑스를 배신했다. 그는 1515년 프랑스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프랑수아 1세의 견제로 인해 갈등을 겪었으며, 아내 쉬잔의 사망 후 상속 문제로 더욱 악화되었다. 이후 카를 5세와 밀약을 맺고 파비아 전투에서 활약했지만, 로마 공방전에서 전사했다. 샤를 3세의 죽음으로 부르봉 공작 가문의 적통은 끊어졌고, 그의 영지는 누이에게 상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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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3세 드 부르봉 공작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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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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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부르봉 공작 |
배우자 | 수잔 드 부르봉 (1505년 5월 10일 결혼, 1521년 4월 28일 사별) |
가문 | 부르봉-몽팡시에 가문 |
아버지 | 질베르, 몽팡시에 백작 |
어머니 | 클라라 곤차가 |
출생일 | 1490년 2월 17일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몽팡시에 |
사망일 | 1527년 5월 6일 |
사망지 | 교황령, 로마 |
통치 | |
밀라노 총독 | 1526년 7월 6일 – 1527년 5월 21일 |
이전 유형 | 군주 |
이전 |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 |
추가 정보 | |
다른 이름 | 샤를 드 몽팡시에 |
2. 생애
샤를 3세는 몽팡시에 백작 질베르와 클라라 사이의 둘째 아들로 몽팡시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1496년에 사망하고, 형 루이 2세가 1501년에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샤를은 가문의 작위와 오베르뉴 지역의 토지를 상속받아 몽팡시에 백작과 오베르뉴 백작이 되었다.[6]
1515년 마리냐노 전투에서 공을 세워 프랑수아 1세에 의해 프랑스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밀라노 총독이 되었으나, 곧 해임되어 프랑스로 소환되었다. 1521년 아내 쉬잔이 사망하자, 프랑수아 1세의 모친 루이즈 드 사부아는 쉬잔의 영지에 대한 상속권을 주장하며 샤를에게 결혼을 제안했지만, 샤를은 이를 거절했다.
프랑수아 1세가 모친을 대신하여 영지를 몰수하자, 분노한 샤를은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와 1523년에 밀약을 맺었다. 카를 5세는 그에게 누이 엘레오노레와의 결혼을 약속했고[1], 샤를은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와도 밀약을 맺었다. 샤를은 프랑수아 1세가 이탈리아에 출병하는 틈을 타 부르고뉴를 공격할 계획이었으나[2], 발각되어 이탈리아로 도망쳤다.[3]
카를 5세는 샤를에게 군대 지휘를 맡겼고, 샤를은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를 포로로 잡는 등 활약했다. 샤를은 스페인으로 갔지만, 주군을 배신한 자로 여겨졌다.[4]
1526년 프랑수아 1세는 마드리드 조약을 맺고 석방되었지만, 귀국 후 조약 불이행을 선언하고 1527년 전쟁을 재개했다. 카를 5세는 샤를에게 로마 침공을 명령했다. 1527년 5월 6일 교황군과의 전투에서 샤를은 교황군을 패퇴시켰으나, 샤를은 저격을 받아 사망했다. 벤베누토 첼리니는 자신이 이 저격을 했다고 주장했다.[5] 지휘관을 잃은 황제군은 통제를 잃고 로마 약탈을 자행했다.
샤를 3세의 죽음으로 부르봉가의 적통은 끊어졌고, 라 마르슈 백 자크 1세의 후손인 방돔 공 샤를이 부르봉가 당주가 되었다. 앙리 4세는 방돔 공 샤를의 손자이다.
2. 1. 혼인
1505년 5월 10일, 샤를은 부계 6촌 여동생인 쉬잔과 혼인하였다. 이는 부르봉 본가의 마지막 적자였던 쉬잔의 아버지 피에르 2세가 아들 없이 사망하자 부르봉 가문의 영지에 대한 상속문제를 매듭짓고자 한 정략 결혼이었다. 샤를은 부르봉 가문 상속의 차기 후손이었으며, 부르봉가의 남계 후손이었고 쉬잔은 유일한 법정 상속인이었다. 이 결혼으로 부르봉 공작으로서 샤를 3세의 지위는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이 결혼은 다른 이유로도 중요했는데, 1525년에 알랑송 공작 샤를 4세가 사망하면서 샤를은 프랑수아 1세의 세 아들 다음으로 프랑스 왕위 계승자가 되었기 때문이다.2. 2. 프랑스군 총사령관 임명과 프랑수아 1세와의 갈등
샤를 3세는 이탈리아 전쟁에서 뛰어난 군인으로 이미 명성을 얻었으며, 1515년 프랑수아 1세에 의해 프랑스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마리냐노 전투에서 선봉을 지휘하며 큰 공을 세워 밀라노 총독직을 받았다.[7] 그러나 프랑수아 1세는 부유하고 강력한 공작을 경계하여 그를 프랑스로 소환하고 전투로 얻은 보상을 취소했다. 샤를 3세는 왕의 조치에 불만을 가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프랑수아 1세의 매형인 알랑송 공작 샤를 4세가 네덜란드 원정에서 선봉 지휘관으로 임명된 것에 더욱 분노했는데, 이 자리는 원래 그의 것이었어야 했다. 지속적인 왕의 견제로 인해 프랑수아 1세와 샤를 3세의 사이는 점차 악화되었다.1521년, 샤를 3세의 부인 쉬잔의 죽음은 샤를 3세와 프랑수아 1세의 관계를 완전히 갈라놓았다. 쉬잔은 샤를에게 모든 영지를 상속했지만, 왕의 어머니 사부아의 루이즈는 혈연 관계상 자신이 더 가깝다며 상속권을 주장했다. 루이즈는 상속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샤를 3세에게 결혼을 제안했으나, 샤를 3세는 루이즈가 55세가 넘었고 자신보다 14년이나 늙었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 (자식이 없던 샤를은 이미 폐경기에 들어선 여성과 혼인할 수는 없었다) 프랑수아 1세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소송이 열리기 전에 샤를 3세의 부르봉 공작 영지를 압류했다.
국왕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샤를 3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밀약을 맺었다. 카를 5세는 그 보상으로 누이 엘레오노레와의 결혼을 샤를에게 약속했다[1] (나중에 엘레오노레는 프랑수아 1세와 결혼했다). 샤를은 또한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와도 밀약을 맺었다. 샤를이 꾸민 계획은 프랑수아 1세가 이탈리아에 출병하는 틈을 타 부르고뉴를 공격하는 것이었으며, 발각되지 않도록 가짜 병을 앓는 척했다.[2] 하지만 프랑수아 1세가 음모의 소문과 이를 뒷받침하는 편지를 입수하면서 음모가 발각되었고, 샤를 3세는 이탈리아로 도망쳤다.[3] 샤를은 직위에서 쫓겨나고 반역자로 선포되었다.
2. 3. 쉬잔의 죽음과 상속 분쟁
프랑수아 1세는 부유하고 강력한 샤를 3세를 견제하기 시작했고, 마리냐노 전투에서 세운 공적에 대한 보상도 취소했다.[7] 샤를 3세는 네덜란드 원정의 선봉 지휘를 샤를 4세(왕의 매형)에게 맡긴 것에 분노했는데, 이는 본래 그의 자리였기 때문이다.1521년, 샤를 3세의 아내 쉬잔이 사망하면서 상속 분쟁이 발생했다. 쉬잔은 샤를에게 모든 영지를 상속했지만, 왕의 어머니 사부아의 루이즈는 자신이 혈연상 더 가깝다며 상속권을 주장했다. 루이즈는 결혼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샤를 3세는 루이즈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프랑수아 1세는 어머니를 대신해 소송 전에 샤를 3세의 영지를 압류했고, 샤를 3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밀약을 맺었다. 신성 로마 황제, 샤를 3세, 헨리 8세는 프랑스를 분할할 계획을 세웠지만 발각되었고, 샤를 3세는 직위를 잃고 반역자로 선포되어 1523년에 이탈리아로 망명했다.[8]
2. 4. 신성 로마 제국으로의 투신
프랑수아 1세는 샤를 3세가 부유하고 강력한 귀족이라는 점을 경계했다. 1515년 마리냐노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밀라노 총독으로 임명되었던 샤를 3세를 프랑스로 소환한 후 그동안 그가 쌓은 군사적 공적에 대한 보상을 취소했다.[7] 왕의 조치에 불만이 있었지만 샤를 3세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샤를 3세는 네덜란드 원정에서 선봉 지휘를 자신의 보직이 아닌 왕의 매형인 알랑송 공작 샤를 4세에게 맡기자 분노했다. 왕의 지속적인 견제로 인해 샤를 3세와 프랑수아 1세의 사이는 점차 악화되었다.1521년 샤를 3세의 부인 쉬잔이 사망하면서 샤를 3세와 프랑수아 1세의 관계는 완전히 파탄났다. 쉬잔은 샤를 3세에게 모든 영지를 상속했지만,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 사부아의 루이즈는 자신이 혈연상 더 가깝다는 이유로 상속권을 주장했다. 루이즈는 상속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샤를 3세에게 결혼을 제안했지만, 샤를 3세는 루이즈가 55세가 넘어 자신보다 14살이나 많고, 이미 폐경기에 들어섰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프랑수아 1세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소송이 열리기도 전에 샤를 3세의 영지를 압류했다.
샤를 3세는 왕을 상대로 승소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밀약을 맺었다. 샤를 3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헨리 8세는 프랑스를 분할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발각되어 샤를 3세는 직위에서 쫓겨나고 반역자로 선포되었다. 1523년 샤를 3세는 이탈리아로 망명했다.[8]
1525년 파비아 전투에 참전한 샤를 3세는 롬바르디아에서 기욤 구피에 드 본니베가 이끄는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코냑동맹전쟁(1526-1530)이 발발하자, 1527년 카를 5세는 샤를 3세에게 스페인-독일 연합군(일부는 루터교도로 구성) 지휘권을 주고 로마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527년 5월 6일 샤를 3세는 로마에 도착하여 공성전을 벌였으나, 전투 중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벤베누토 첼리니는 자신이 샤를 3세를 사살했다고 주장했다. 샤를 3세의 전사로 황제군은 흥분하여 지휘 체계가 무너졌고, 분노한 황제군은 로마를 점령한 후 무자비하게 약탈을 자행했다.[8]

3. 신성 로마 제국에서의 활약과 죽음
이탈리아 전쟁에서 군인으로서 능력을 인정받은 샤를 3세는 1515년에 프랑수아 1세에 의해 프랑스의 콘네타블로 임명되었다. 마리냐노 전투에서 선봉을 지휘하며 큰 공을 세웠고, 그 대가로 밀라노 총독직을 받았다.[7] 그러나 프랑수아 1세는 부유하고 강력한 공작의 등장을 경계하여 그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프랑수아 1세는 샤를 3세를 프랑스로 소환하고 전투를 통해 얻은 보상을 취소했다. 샤를 3세는 왕의 조치에 불만을 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샤를 3세는 네덜란드 원정에서 선봉 지휘를 왕의 매형인 샤를 4세에게 맡긴 것에 분노했다. 본래 선봉 지휘는 그의 권한이었기 때문이다. 왕의 지속적인 견제로 인해 프랑수아 1세와 샤를 3세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다.
1521년 샤를 3세의 부인 쉬잔이 사망하면서 샤를 3세와 프랑수아 1세의 관계는 완전히 파탄 났다. 쉬잔은 샤를에게 모든 영지를 상속했지만, 왕의 어머니 사부아의 루이즈는 자신이 혈연상 더 가깝다는 이유로 상속권을 주장했다. 루이즈는 상속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샤를 3세에게 결혼을 제안했으나, 샤를 3세는 루이즈가 55세가 넘었고 자신보다 14살이나 많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자식이 없던 샤를은 이미 폐경기에 들어선 여성과 혼인할 수 없었다.) 프랑수아 1세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소송이 열리기도 전에 샤를 3세의 영지를 압류했다.
샤를 3세는 국왕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밀약을 맺고 그를 섬기기로 했다. 신성 로마 황제, 샤를 3세, 헨리 8세는 프랑스를 분할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이 계획은 발각되어 샤를 3세는 직위에서 쫓겨나고 반역자로 선포되었다. 결국 샤를 3세는 1523년에 이탈리아로 망명했다.
코냑동맹전쟁(1526-1530)이 발발하자, 황제 카를 5세는 1527년에 샤를에게 스페인-독일 연합군(루터교도로 구성) 지휘권을 주고 로마 탈환을 위해 남쪽으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527년 5월 6일 로마에 도착한 후 벌어진 공성전에서 샤를은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로마 수비군으로 참전했던 벤베누토 첼리니는 자신이 샤를을 사살했다고 주장했다. 샤를의 전사로 황제군(스페인+독일 연합)은 흥분했고 지휘 체계가 무너졌다. 분노한 황제군은 로마를 점령하고 무자비하게 약탈했다.[8]
3. 1. 파비아 전투
1524년 샤를 3세는 롬바르디에서 기욤 구피에, 보니베 영주 휘하의 프랑스군을 몰아냈고, 파비아 전투에서 활약했다.[8]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샤를 3세는 프랑수아 1세를 포로로 잡는 등의 큰 공을 세웠다.[4]3. 2. 로마 약탈
샤를은 이탈리아 전쟁에서 뛰어난 군인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1515년 마리냐노 전투에서 선봉을 지휘하는 등의 공로로 프랑수아 1세에 의해 프랑스 원수로 임명되었고, 밀라노 총독직을 받았다.[1] 그러나 프랑수아 1세는 자부심 강하고 부유한 샤를을 불안하게 여겨, 곧 그를 밀라노에서 소환하고 빚을 변제하는 것을 거부했다.1521년 그의 아내 쉬잔이 사망하자, 프랑수아 1세의 모친 사부아의 루이즈는 쉬잔이 샤를에게 유증한 부르봉 영토 상속권을 주장했다. 루이즈는 혈통상 상속권 우위에 있었고, 샤를에게 자신과의 결혼을 통한 상속권 문제 해결을 제안했지만, 샤를은 루이즈가 45세가 넘었고 자신보다 14살이나 많았기에 이 제안을 거절했다. 프랑수아 1세가 모친을 대신하여 영지를 몰수하자, 분노한 샤를은 왕을 배신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하고 1523년에 밀약을 맺었다.
카를 5세는 샤를에게 독일인과 스페인인 혼성군 지휘를 맡겼으며, 샤를은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를 포로로 잡는 등 활약을 보였다. 1526년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와 마드리드 조약을 맺고 석방되었지만, 귀국 후 조약 불이행을 선언하고 1527년 전쟁을 재개했다. 카를 5세는 프랑스와 결탁한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보복하기 위해 샤를을 지휘관으로 하는 군대를 로마로 보냈다.
샤를은 이 군대에 돈이나 식량을 제대로 보급하지 않았고, 약탈에 대한 약속으로만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다. 클레멘스 7세는 황제와 휴전을 맺었지만, 군대는 계속 진격하여 1527년 5월 로마에 도착했다. 그해 5월 6일 교황군과의 전투에서 샤를은 교황군을 패퇴시키고, 교황은 산탄젤로 성으로 도망쳤다. 샤를의 군대는 로마를 포위했고, 샤를이 직접 진두지휘했지만 사다리에 오르던 중 저격을 받아 사망했다. 벤베누토 첼리니는 자서전에서 이 저격을 한 사람이 자신이라고 밝혔다.[5] 지휘관을 잃은 황제군은 통제를 잃고, 로마 약탈이 발생했다.
4. 유산과 계승
샤를 3세는 아내 쉬잔과의 사이에서 쌍둥이를 얻었으나, 이들은 얼마 살지 못하고 사망했다. 1527년 샤를 3세가 전사하면서 부르봉 공작 가문의 직계 남계는 단절되었다. 샤를 3세는 반역 행위로 인해 영지를 몰수당했기 때문에, 방계인 방돔 공작 가문에 의한 승계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몽팡시에 백작령과 오베르뉴 도팽령은 그의 누이인 루이즈에게 반환되었다. 루이즈는 방계 가문인 부르봉-방돔 가문의 라 로슈 쉬르 용 공 루이와 결혼하여, 몽팡시에 공작 가문은 그녀의 후손을 통해 이어졌다.[9]
샤를 3세의 사망으로, 루이 1세의 장남 피에르 1세 계통인 부르봉 가문의 적통은 단절되었다. 이후 루이 1세의 넷째 아들 라 마르슈 백 자크 1세의 후손인 방돔 공 샤를이 부르봉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프랑스 국왕이자 나바라 국왕이 된 앙리 4세는 방돔 공 샤를의 손자이다.
4. 1. 인도의 부르봉 가문
"인도의 부르봉 가문"은 무굴 제국의 황제 아크바르의 친척인 몽골 공주 알래뉴 알티무르와 결혼한 샤를 드 부르봉의 사생아 장 필리프 드 부르봉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9]참조
[1]
서적
イタリア史VII
太陽出版
[2]
서적
同
[3]
서적
同
[4]
서적
イタリア史VIII
太陽出版
[5]
서적
チェッリーニ自伝・上
岩波文庫
[6]
서적
The Court and Reign of Francis the First, King of France
Lea and Blanchard:Philadelphia
[7]
서적
A history of France
Thomas Y. Crowell and Co.:Boston
[8]
서적
The Catacombs of Rome
The Old Corner Bookstore Inc.: Boston
[9]
문서
Jean Philippe, a courtier of the khan, b.1525, d.after 1560; m. a sister of the khan; This son, Jean Philippe de Bourbon, ended up as a courtier of the [[Akbar|Khan in Delhi, In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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